에픽의 책장 | 6분 읽기

같은 레벨 책만 읽는 아이, 실력이 멈춘 게 아니다

에픽어학원 , 읽기의 과학, 원서 중심, 데이터 기반 영어 교육

같은 레벨의 책을 여러 권 읽는 아이를 보며 부모는 실력이 제자리인가 불안해 레벨을 밀어 올린다. 이 글은 같은 수준에서 넓게 읽는 수평 읽기가 후퇴가 아니라 단어 자동화와 어휘, 배경지식이 쌓이는 시간이라는 것을 읽기 연구로 확인하고, 장르와 형식을 바꿔 잘 넓히는 법과 넓힐 때인지 올릴 때인지를 가르는 관찰 신호를 안내한다.


레벨을 올려야 실력이 는다는 생각

아이 책장에 비슷한 수준의 얇은 영어책이 스무 권쯤 꽂혀 있다. 아이는 그중 몇 권을 다시 꺼내 읽고, 새로 고르는 책도 늘 그 언저리다. 부모는 흐뭇하다가 문득 불안해진다. 몇 달째 같은 수준만 읽는데 이게 느는 걸까. 옆집 아이는 벌써 한 칸 위 책을 읽는다는데. 그 마음에 부모는 조금 더 두꺼운 책, 한 단계 위 레벨의 책을 슬며시 얹어 준다. 엄마표 영어 커뮤니티에도 같은 조바심이 흐른다. 같은 레벨에 오래 머물면 정체이고 레벨 숫자가 올라가야 실력이 오른 것이라는 감각, 그래서 레벨을 빨리 올려 주는 곳을 찾는 렙업 조바심이다. 문제는 레벨 숫자를 올리는 수직 방향으로 갈지, 같은 수준에서 읽는 책의 폭을 넓히는 수평 방향으로 갈지다. 우리는 이 조바심을 다르게 읽는다. 같은 수준에서 넓게 읽는 시간은 멈춤이 아니라 일을 하는 시간이다.

넓게 읽기가 후퇴가 아니라는 근거

레벨을 올리는 쪽이 성장이고 같은 자리는 정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지만, 읽기 연구는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Kuhn 연구진은 2006년 미국 뉴저지와 조지아의 2학년 24개 학급을 세 조건으로 나눠 한 해를 관찰했다. 한 조건은 같은 글 한 편을 그 주 내내 반복해 읽었고(repeated reading), 다른 조건은 매주 서로 다른 글 세 편을 넓게 읽었다(wide reading). 학년 말에 넓게 읽은 학급은 단어를 빠르고 정확히 읽는 힘과 독해에서 반복해 읽은 학급과 대등하게 성장했고, 소리 내어 읽는 유창성에서는 향상이 더 일찍, 학년 중반에 이미 나타났다. 넓게 읽는 것이 반복만큼, 어떤 면에서는 더 이르게 읽는 힘을 길렀다는 뜻이다.

왜 그런지는 어휘 쪽에서 설명된다. 다독을 연구하고 보급해 온 국제 단체 Extensive Reading Foundation의 지도 가이드는, 한 페이지의 단어를 약 98% 이상 알 때 아이가 사전 없이 빠르고 온전하게 이해하며 이 구간에서 읽기가 즐거움이 된다고 정리한다. 반대로 모르는 단어가 열에 하나를 넘어서면 읽기는 사전을 뒤지는 버티기로 바뀌고 이해가 무너진다. 레벨을 한 칸 올린다는 것은 아이를 이 즐거운 구간에서 버티는 구간으로 밀어 넣기 쉬운 일이다. 같은 수준에서 권수를 넓히는 수평 읽기는 반대로 아이를 98%의 구간에 오래 머물게 한다.

같은 자리에서 자라는 세 가지

98%의 구간에 머무는 동안 세 가지가 쌓인다. 첫째, 단어를 하나하나 풀지 않고 통째로 알아보는 자동성(automaticity, 힘들이지 않고 바로 읽어 내는 상태)이다. 같은 수준의 쉬운 문장을 많이 지날수록 아이는 단어를 푸는 데 쓰던 품을 뜻을 헤아리는 데로 옮긴다. Kuhn 연구진의 논문 제목이 유창하고 자동적인 읽기를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둘째, 어휘가 뿌리내린다. 한 번 만난 단어는 잊히기 쉽지만, 여러 책에서 다른 문장으로 같은 단어를 거듭 만나면 그 뜻이 몸에 남는다. 넓게 읽는 아이는 위로만 좁게 오르는 아이보다 같은 단어를 다시 만나는 횟수가 많다. 셋째, 배경지식이 넓어진다. 여러 이야기와 주제를 지나며 쌓인 지식은 다음 책에서 모르는 것을 추측하는 바탕이 된다. 이 세 가지는 레벨 숫자에 바로 잡히지 않지만, 다음 단계를 실제로 받치는 힘이다.

잘 넓히는 법

넓게 읽으라는 말이 같은 책을 스무 번 다시 읽으라는 뜻은 아니다. 수평 읽기는 같은 수준 안에서 다른 책으로 폭을 넓히는 일이고, 넓히는 데는 방향이 있다. 하나는 장르를 바꾸는 것이다. 탐정물만 읽던 아이에게 같은 수준의 일상물이나 판타지를 놓아 주면, 익숙한 난이도 안에서 새 어휘와 새 상황을 만난다. 다른 하나는 형식을 바꾸는 것이다. 줄글로만 읽던 아이에게 일기체나 그림이 많은 형식을 섞어 주면, 같은 수준에서도 읽는 결이 달라져 물리지 않는다. 여기에 다독과 정독을 나누어 쓰는 방법이 더해진다. Extensive Reading Foundation은 쉽고 재미있는 책을 사전 없이 많이 읽는 다독(extensive reading)과 한 권을 꼼꼼히 파고드는 정독을 서로 다른 일로 본다. 수평 읽기 구간에서는 다독의 비중을 크게 두어 즐겁게 많이 읽히고, 정독은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한 권에만 짧게 쓴다.

같은 수준 안에서 장르와 형식을 바꿔 넓히기에 맞는 시리즈가 있다.

  • Marjorie Weinman Sharmat의 Nate the Great. 1972년부터 이어져 온 꼬마 탐정 이야기로, 한 수준에서 여러 권이 길게 이어져 레벨을 올리지 않고도 오래 머물며 권수를 쌓기에 좋다.
  • Rebecca Elliott의 Owl Diaries. 스콜라스틱의 얼리 챕터북 라인 브랜치스(Branches)에 속한 일기체 시리즈로, 말풍선과 전면 컬러 그림을 섞은 형식이라 줄글에 물린 아이에게 같은 수준의 다른 결을 준다.
  • Shannon Hale과 Dean Hale의 Princess in Black. 사건 전개가 빠른 그림 많은 이야기로, 탐정물이나 일상물과는 다른 활극의 재미로 폭을 넓힌다.

세 시리즈의 공통점은 난이도를 올리지 않고 장르와 형식만 바꿔, 아이가 같은 자리에서 지루하지 않게 많이 읽게 한다는 데 있다.

넓힐 때와 올릴 때

그러면 언제까지 넓히고 언제 올리는가. 이 판단은 레벨 숫자가 아니라 아이를 보고 정한다. 두 가지를 살핀다. 첫째, 지금 책이 사전 없이 흐르게 읽히는가. 아이가 자주 멈추고 모르는 단어를 자꾸 물으면 책이 이미 높은 것이니, 오히려 한 걸음 낮춰 98%의 구간으로 돌려놓는다. 둘째, 같은 수준의 새 책이 아직 아이에게 새로운가. 장르와 형식을 바꿔 주어도 아이가 시시해하며 대충 속도만 내고 새로 만나는 것이 없다면, 그때가 한 칸 올릴 때다. 반대로 같은 수준의 다른 책에서 여전히 웃고 놀라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한다면, 아직 넓힐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올리는 결정은 아이가 지금 자리를 다 쓴 뒤에 와도 늦지 않다.

올릴지 넓힐지는 결국 부모가 아이를 보고 내리는 선택이다. 레벨 숫자가 멈춰 보이는 몇 달은 실력이 멈춘 시간이 아니라, 단어와 어휘와 배경지식이 조용히 두터워지는 시간일 수 있다. 에픽이 아이의 다음 책을 고를 때도 순서는 같다. 측정된 수준 안에서 넓게 읽을 책을 먼저 놓고, 올리는 때는 레벨 숫자가 아니라 아이의 반응으로 정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레벨의 책이 아니라, 지금 수준을 남김없이 즐길 만큼 넉넉한 책의 폭이다.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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