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의 책장 | 5분 읽기

해리포터 원서, 우리 아이는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에픽어학원 , 읽기의 과학, 원서 중심, 데이터 기반 영어 교육

해리포터 1권의 지수는 초등 고학년 수준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진짜 문턱은 숫자가 아니다. 7만 단어가 넘는 이야기를 끝까지 붙들고 가는 체력과 영국 기숙학교 문화라는 배경지식이 관건이다. 그래서 부모가 물을 것은 몇 살부터가 아니라 아이의 읽기 이력에 어떤 신호가 쌓였는가다. 1권과 4권이 사실상 다른 책이라는 점까지 보면, 기다림이 왜 뒤처짐이 아닌지도 보인다.


원서를 읽고 싶다는 아이 앞에서

영화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전부 본 열 살 아이가 어느 날 원서 세트 앞에서 말한다. “나 이거 영어로 읽어 보고 싶어.” 부모의 손은 이미 전집 검색창에 가 있다. 그런데 지수로 보면 초등 고학년 수준이라는 이 책의 진짜 문턱은 숫자가 아니다. 7만 단어를 끝까지 붙들고 가는 체력, 그리고 영국 기숙학교라는 낯선 세계가 관건이다.

숫자로 먼저 보는 해리포터

1권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의 AR 북레벨(ATOS Book Level)은 5.5, Lexile 지수(Lexile measure)는 880L, 총 단어 수는 77,508개다. 숫자만 보면 챕터북을 읽는 초등학생이라면 도전할 만해 보인다.

이 지수들이 어떻게 계산되고 어디까지 믿을 만한지는 그 자체로 다른 글감이라 여기서는 줄인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 아이가 이 책 앞에서 실제로 만나는 두 개의 문턱이 저 숫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판단 기준은 책의 지수가 아니라 아이의 상태다. 지금 읽는 챕터북을 사전 없이, 줄거리를 놓치지 않고 재미로 완주하는 아이라면 880L은 넘을 수 있는 높이다. 그런 완주 이력이 없다면 5.5라는 숫자가 낮아 보여도 벽이 된다.

숫자 바깥에 있는 두 개의 문턱

77,508단어를 버티는 체력

첫 번째 문턱은 분량이다. 77,508단어는 아이가 그간 완주해 온 챕터북 여러 권을 합친 양이다. 이만한 분량을 버티는 체력이 어디서 오는지 보여 주는 고전 연구가 있다. Anderson, Wilson, Fielding은 1988년 미국 초등 5학년 아이들이 학교 밖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기록하게 했다. 여러 활동 가운데 읽기 실력의 성장을 가장 잘 예측한 것은 책을 읽으며 보낸 시간이었고, 많이 읽는 아이와 거의 읽지 않는 아이가 한 해 동안 만나는 단어의 양은 몇 배가 아니라 자릿수가 다를 만큼 벌어져 있었다.

해리포터 완주는 이 누적의 결과물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하루 몇 분이라도 책과 보내 온 시간이 쌓인 아이에게 77,508단어는 그저 긴 이야기지만, 긴 책을 끝까지 읽어 본 이력이 없는 아이에게는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체력은 책 한 권으로 생기지 않는다.

호그와트라는 낯선 세계

두 번째 문턱은 배경지식이다. 배경지식이 읽기 실력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 실험이 Recht와 Leslie의 1988년 야구 연구다. 읽기 능력과 야구 지식이 서로 다른 미국 중학생들에게 야구 경기 한 장면을 담은 글을 읽게 했더니, 읽기 능력은 낮지만 야구를 잘 아는 아이가 읽기 능력은 높지만 야구를 모르는 아이보다 내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재연했다. 글은 같았다. 독자가 가진 세계에 대한 지식이 달랐을 뿐이다.

해리포터에서 야구장에 해당하는 무대가 영국 기숙학교다. 기숙사 배정과 기숙사 점수 경쟁, 반장(prefect), 크리스마스 만찬, 9와 4분의 3 승강장이 있는 King’s Cross 역까지, 1권의 장치들은 영국 독자에게는 익숙한 세계를 살짝 비튼 것이지만 한국 아이에게는 통째로 낯선 세계다. 같은 880L이라도 이 세계의 결을 아는 독자와 모르는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말장난과 조어도 어떤 지수에도 잡히지 않는다. 마법사 상점가 Diagon Alley는 ‘대각선으로’라는 뜻의 diagonally를 쪼갠 이름이고, 1권에서 해리가 마주치는 거울에 새겨진 Erised는 desire를 거꾸로 쓴 글자다. 이런 장치를 알아채는 독자와 지나치는 독자에게 같은 페이지는 다른 깊이로 읽힌다.

1권과 4권은 사실상 다른 책이다

시리즈 안에서도 난이도는 한 계단씩 오르지 않는다. 4권 Harry Potter and the Goblet of Fire는 북레벨 6.8에 단어 수 190,858개로, 1권의 두 배 반에 이르는 분량이다.

정서의 곡선은 분량보다 가파르다. 4권은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또래 인물의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고, 5권부터는 상실감과 어른 세계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전쟁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1권을 학교 판타지로 즐긴 아이가 그 무게를 같은 속도로 따라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1권을 읽었다”가 “시리즈가 열렸다”를 뜻하지 않는다. 4권 앞에서는 읽기 수준만이 아니라 아이의 정서 준비를 같이 본다.

준비됐다는 신호는 읽기 이력에서 보인다

우리가 상담에서 학년보다 먼저 묻는 것은 아이가 지금까지 읽어 온 책이다. 다음 신호가 보이면 1권을 시작할 만하다.

  • 챕터북 시리즈 하나를 누가 시키지 않아도 끝까지 완주한 경험이 있다
  • 200페이지 안팎의 소설을 사전 없이 완독하고 줄거리를 제 말로 요약할 수 있다
  • 영화 장면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글로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어 한다

셋 중 둘 이상이면 시작할 때다. 하나 이하라면 아직 다리를 놓을 시간이다.

아직이라면, 건너가는 다리를 놓는다

신호가 아직이라면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 시간에 건너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 The Chronicles of Narnia의 한 권 한 권이나 Roald Dahl의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는 해리포터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긴 판타지를 끝까지 읽어 내는 경험을 만들어 준다. 오디오북을 곁에 두고 눈과 귀로 함께 따라가면 진입 부담도 낮아진다.

아이들이 해리포터를 원하는 이유는 단어가 아니라 세계다. 호그와트에 살고 싶어서 그 두꺼운 책을 집어 든다. 그 마음이 첫 완독으로 이어지려면 적기가 필요하다. 적기는 학년이 아니라 신호로 오고, 기다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아이의 첫 해리포터 완독 경험을 지키는 선택이다.

참고한 자료

  • Renaissance Learning, AR BookFinder.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ATOS BL 5.5, 77,508 words), Harry Potter and the Goblet of Fire (ATOS BL 6.8, 190,858 words).
  • MetaMetrics(Lexile).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Lexile 880L.
  • Recht, D. R., & Leslie, L. (1988). Effect of Prior Knowledge on Good and Poor Readers’ Memory of Text. Journal of Educational Psychology.
  • Anderson, R. C., Wilson, P. T., & Fielding, L. G. (1988). Growth in Reading and How Children Spend Their Time Outside of School. Reading Research Quarte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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