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만 읽던 아이의 첫 챕터북, 무엇부터 고를까
그림책을 잘 읽던 아이도 글이 빽빽한 챕터북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그림책과 챕터북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한 번에 오르라고 하면 아이는 읽기에서 멀어진다. 이 글은 레벨이 오르면 자연히 넘어간다는 통념 대신, 삽화 비중을 서서히 줄여 주는 다리 책이라는 기준을 제안하고, 그 기준에 맞는 실제 시리즈를 단계별로 안내한다.
첫 챕터북에서 아이가 멈추는 이유
그림책을 곧잘 읽던 아이가 글이 빽빽한 챕터북을 펴자마자 덮는다. 부모는 레벨이 올랐으니 이제 챕터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림책과 챕터북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계단이 있다. 그림에 기대 읽던 아이에게 글자만 가득한 책은 낯선 세계다. 이 계단을 한 번에 오르라고 하면 아이는 읽기에서 멀어진다. 첫 챕터북은 삽화가 서서히 줄어드는 다리 책(bridge book)이라는 기준으로 고르는 편이 안전하다.
그림책과 챕터북 사이의 계단
그림책에서 그림은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절반이다. 아이는 그림에서 인물의 표정을 읽고,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글이 말하지 않은 것을 채운다. 챕터북으로 넘어가면 이 절반이 사라진다. 아이는 글자만으로 장면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게다가 챕터북은 한 자리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챕터에 걸쳐 이야기를 이어 가므로, 앞 내용을 붙들고 가는 힘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 그림 없이 장면을 세우는 힘과 긴 이야기를 붙드는 힘이 첫 챕터북의 진짜 관문이다.
그래서 레벨 숫자만 보고 책을 올리면 아이는 관문 앞에서 멈춘다. 숫자가 맞아도, 그림의 도움이 갑자기 끊기면 아이는 읽고는 있으나 장면을 못 세우는 상태에 빠진다. 다리 책은 이 관문을 한 계단씩 나눠 준다. 그림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서서히 줄여, 아이가 글자만으로 장면을 세우는 힘을 조금씩 기르게 한다.
이 계단은 우리끼리의 인상이 아니라 문헌에도 있는 이야기다. 미국 초등 교실에서 널리 쓰이는 텍스트 레벨링(text leveling, 책의 난이도를 단계로 매기는 일) 체계를 정리한 Fountas와 Pinnell은 책의 수준을 매길 때 어휘와 문장 길이만 보지 않는다. 그림이 글의 이해를 얼마나 받쳐 주는지도 난이도를 가르는 요소로 함께 따진다. 같은 문장이라도 그림의 도움이 빠지면 아이에게는 더 어려운 책이 된다는 뜻이고, 삽화 비중을 첫 기준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챕터북을 고르는 세 가지 기준
레벨 숫자보다 먼저 볼 것은 다음 세 가지다.
- 삽화 비중. 페이지마다 그림이 있어 아직 그림의 도움을 받는 책인가. 다리 책은 삽화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서서히 줄인다. 그림이 남아 있는 동안 아이는 글자에 익숙해질 시간을 번다.
- 챕터 길이. 한 챕터가 짧아 한 번에 끝맺는 성취감을 주는가. 짧은 챕터는 여기까지 읽었다는 완결의 경험을 자주 만들어 준다. 이 작은 완결이 모여 한 권의 완독이 된다.
- 아이의 관심사. 아이가 이미 좋아하는 주제나 캐릭터인가. 첫 챕터북에서는 난이도보다 재미가 완독을 만든다. 재미있는 책이면 아이는 조금 어려운 문장도 스스로 넘어간다.
이 세 기준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아이가 지금 혼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책인가. 너무 쉬우면 배울 것이 없고, 너무 어려우면 중간에 덮는다. 아이가 대부분 혼자 읽어 내되 군데군데 새로운 것이 남아 있는 책이 첫 챕터북으로 알맞다.
단계로 놓는 다리 책
아래는 삽화 비중에 따라 대략의 순서로 놓은 실제 시리즈다. 순서는 고정된 서열이 아니라 하나의 참고선이다. 같은 나이라도 아이마다 넘어가는 지점이 다르므로, 낱권으로 한 권씩 반응을 확인한 뒤 넓혀 가는 것이 좋다.
고르는 눈이 흔들릴 때는 수상 이력이 참고가 된다. 미국도서관협회(American Library Association) 산하 어린이도서관서비스협회(Association for Library Service to Children, ALSC)는 2006년부터 해마다 막 혼자 읽기 시작한 아이를 위한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책에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상(Theodor Seuss Geisel Award)을 준다. 닥터 수스의 본명을 딴 상이다. 초기 독자용 책만 따로 심사하는 상이므로, 어떤 시리즈가 검증된 다리인지 가려 주는 바깥의 기준이 된다.
아직 그림이 많이 필요한 아이
Arnold Lobel의 Frog and Toad와 Mo Willems의 Elephant and Piggie는 그림책과 챕터북 사이의 첫 다리다. 두 시리즈 모두 문장이 짧고 반복이 많으며, 대화 위주로 이야기가 굴러가 소리 내어 읽기에 좋다. Frog and Toad는 개구리와 두꺼비 두 친구의 잔잔한 일상을 짧은 이야기 여러 편으로 나눠 담아, 한 편을 끝내는 완결의 경험을 자주 준다. 이 시리즈가 정확히 그림과 글 사이에 서 있다는 사실은 수상 이력이 말해 준다. 첫 권 Frog and Toad Are Friends는 그림책의 그림에 주는 칼데콧 아너(Caldecott Honor)에, 다음 권 Frog and Toad Together는 글 중심의 어린이문학에 주는 뉴베리 아너(Newbery Honor)에 올랐다. 그림에 주는 상과 글에 주는 상 양쪽에 이름을 올린 드문 시리즈다. Elephant and Piggie는 거의 모든 문장이 두 주인공의 말풍선 대화로 되어 있어, 아이가 인물의 목소리를 나눠 읽으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가이젤상 메달을 두 차례 받았고 아너 목록에도 여러 번 오른 시리즈다. Tedd Arnold의 Fly Guy는 페이지마다 큰 그림과 짧은 문장이 함께 가고 유머가 강해, 책을 낯설어하는 아이의 손을 붙든다. 이 시리즈의 첫 권은 가이젤상이 처음 시상된 해의 아너 책이다.
짧은 챕터로 넘어가는 아이
여기서부터는 책이 처음으로 챕터라는 형식을 갖춘다. Kate DiCamillo의 Mercy Watson은 페이지마다 큰 컬러 삽화가 있으면서도 여러 챕터로 나뉘어 있어, 챕터북의 생김새를 부담 없이 경험하게 한다. 뉴베리 메달을 두 번 받은 작가가 막 챕터북을 시작한 아이의 눈높이로 내려와 쓴 시리즈이기도 하다. 토스트를 좋아하는 돼지 머시가 벌이는 소동이 밝고 단순해, 아이가 다음 챕터가 궁금해 책장을 넘긴다. Cynthia Rylant의 Henry and Mudge는 소년 헨리와 커다란 개 머지의 따뜻한 일상을 짧은 챕터로 담는다. 문장이 쉽고 삽화가 넉넉해, 챕터가 나뉘어도 아이가 부담 없이 한 권을 끝낸다. 2006년 첫 가이젤상 메달도 이 시리즈의 Henry and Mudge and the Great Grandpas에 돌아갔다. 초기 독자를 위한 상이 첫해에 고른 책이 바로 이 자리의 책이라는 뜻이다. 이 단계의 목표는 챕터라는 형식에 몸을 익히는 것이지, 글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다.
글이 늘어도 견디는 아이
Mary Pope Osborne의 Magic Tree House는 삽화가 여전히 있으면서 글의 비중이 한 단계 커진다. 매 권 같은 구조가 반복되어 늘어난 글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시리즈가 길어 완독의 경험을 이어 가기에도 좋다. 이 시리즈를 어떻게 읽어 나갈지는 따로 다룰 만큼 이야기가 많으므로, 여기서는 다리의 마지막 칸이라는 자리만 확인해 둔다.
단계를 올려도 되는 세 가지 신호
단계를 올리는 시점은 나이나 레벨 숫자가 정해 주지 않는다. 아이가 보여 주는 신호로 정한다. 특별한 도구 없이 거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호는 세 가지다.
- 한 챕터를 한 자리에서 스스로 끝내는가. 중간에 그만 읽자고 하지 않고 챕터의 끝까지 가면, 지금 단계의 글 분량이 아이 몸에 익었다는 뜻이다.
- 그림이 없는 페이지를 읽고 나서 방금 장면을 자기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림 없이도 머릿속에 장면이 서고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소리는 잘 내는데 장면을 말하지 못하면 아직 그림이 더 필요한 때다.
- 책을 덮은 뒤 같은 시리즈의 다음 권을 아이가 먼저 찾는가. 다음 권을 찾는 아이는 이미 이야기 안에 들어가 있어서, 글이 조금 늘어도 스스로 건너간다.
셋 중 둘이 보이면 다음 단계의 책을 낱권으로 한 권 놓아 주고 반응을 본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책만 올리면 아이는 다시 관문 앞에 선다.
목표는 어려운 책이 아니라 완독이다
첫 챕터북 단계에서 부모가 세울 목표는 더 어려운 책으로 빨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혼자 한 권을 끝내는 경험을 여러 번 쌓는 것이다. 완독이 쌓이면 아이는 다음 책을 스스로 집어 들고, 그 손이 우리가 기다리는 결과다.
수상 이력은 책을 고를 때의 참고선이고, 위의 세 신호는 아이를 볼 때의 참고선이다. 이 둘을 손에 쥐면 레벨 숫자 없이도 다음 책을 고를 수 있다. 다리는 서두르지 않고 한 칸씩 건널 때 가장 튼튼하다.
참고한 자료
- Association for Library Service to Children, American Library Association. Theodor Seuss Geisel Award 수상 기록 (2006년 첫 시상).
- Association for Library Service to Children, American Library Association. Newbery Medal 및 Caldecott Medal 수상 기록.
- Fountas, I. C., & Pinnell, G. S. (1996). Guided Reading: Good First Teaching for All Children. Heinema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