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 지수, Lexile, GRL은 무엇이 다르고 어디까지 믿을 수 있나
영어 원서를 고르다 보면 AR, Lexile, GRL 같은 지수를 만난다. 이 글은 세 지수가 각각 무엇을 어떻게 재는지 구분하고, 미국 학년을 공통 자로 삼아 셋을 대략 견주는 대응표를 제시한다. 이어 아이 지수를 한 점이 아니라 범위로 읽는 법과, 비슷한 지수의 두 원서가 정서 무게와 배경지식 때문에 전혀 다른 책이 되는 이유를 실제 작품으로 짚는다. 마지막으로 원어민 기준 지수를 한국 아이에게 적용할 때 생기는 착시를 어떻게 걸러 읽을지 정리한다.
서점과 커뮤니티를 채운 세 개의 숫자
부모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보면 원서 이야기가 숫자로 오간다. “AR 3점대 뭐 읽혀요”, “우리 아이 렉사일 몇인데 다음은 뭐가 좋을까요” 같은 말이 자연스럽다. 온라인 서점의 원서 상세 페이지에도 제목보다 먼저 AR 몇 점, 렉사일 몇, 이런 숫자가 붙는다. 원서는 어느새 숫자로 먼저 소개되고, 아이도 숫자로 분류된다. 숫자가 붙어 있으니 객관적으로 보이고, 부모는 그 숫자에 아이를 맞추려 한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셋 다 공통으로 재지 못하는 것이 있다. AR, Lexile, GRL을 잘 쓰려면 각각 무엇을 재는지, 셋을 어떻게 견주는지, 그리고 무엇을 못 재는지를 함께 알아야 한다. 이 글은 그 셋을 한자리에 놓고, 지수가 잡아 주는 범위와 지수가 놓치는 자리를 구분한다.
세 지수는 무엇을 재나
AR과 ATOS 북레벨
AR은 미국의 Renaissance Learning이 만든 읽기 관리 프로그램인 Accelerated Reader(가속 읽기)의 줄임말이다. 여기서 쓰는 난이도 지표가 ATOS 북레벨로, 문장 길이와 단어의 난이도 같은 요소를 공식에 넣어 계산한다. 결과는 4.7처럼 미국 학년과 개월에 대응하는 숫자로 나온다. 4.7은 미국 4학년 일곱째 달 수준의 텍스트라는 뜻이다. AR에는 책을 읽은 뒤 푸는 퀴즈가 딸려 있어, 아이가 내용을 얼마나 붙들고 읽었는지 확인하는 데 쓰인다.
Lexile 지수
Lexile(렉사일)은 미국의 교육 측정 기관 MetaMetrics가 만든 지표다. 800L처럼 뒤에 L을 붙인 숫자로 표시하며, 역시 문장 길이와 단어 빈도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난이도를 계산한다. Lexile의 특징은 책의 난이도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수준도 같은 척도로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이의 지수와 책의 지수를 같은 자 위에 놓고 견주어 볼 수 있다. 아이가 750L이고 책이 800L이면, 지금보다 조금 위에 있는 책이라는 판단이 선다.
GRL, 교사가 함께 보는 읽기 단계
GRL은 Guided Reading Level(안내식 읽기 단계)의 줄임말로, 교육자 Fountas와 Pinnell이 정리한 체계다. A부터 Z까지 알파벳으로 단계를 매긴다. 앞의 두 지수가 공식으로 계산하는 반면, GRL은 교사가 문장 구조, 어휘, 내용, 삽화의 도움 정도 같은 여러 특성을 함께 보아 정한다. 그래서 사람의 판단이 더 많이 들어간 지표다. 계산으로 잡히지 않는 결을 사람이 보정한다는 점에서, 지수만으로 부족한 자리를 메우는 성격을 지닌다.
세 지수를 나란히 놓으면
부모가 실제로 부딪히는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책은 AR로, 어떤 책은 렉사일로, 어떤 목록은 GRL로 표시되어 있어 서로 옮겨 읽기가 어렵다. 세 지수를 완벽히 환산하는 공식은 없지만, 미국 학년을 공통의 자로 삼으면 대략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는 견줄 수 있다. 제작사들이 각자 공개한 학년 대응을 한자리에 모으면 다음과 같다.
| 대략의 미국 학년 | AR(ATOS 북레벨) | Lexile | GRL(Fountas & Pinnell) |
|---|---|---|---|
| 초등 저학년(1, 2학년) | 1.0-2.9 | 초기 단계에서 500L 안팎 | A-M |
| 초등 중학년(3, 4학년) | 3.0-4.9 | 500-800L 안팎 | N-S |
| 초등 고학년(5, 6학년) | 5.0-6.9 | 800-1000L 안팎 | T-Y |
| 중등 이상 | 7.0 이상 | 1000L 이상 | Z 이상 |
이 표는 방향을 잡는 용도이지 환산기가 아니다. ATOS가 학년과 개월에 대응한다는 것은 Renaissance의 설명이고, 학년별 Lexile 범위는 미국 공통 핵심 성취기준(Common Core State Standards, CCSS)이 정리한 텍스트 난이도 구간을 따른 것이며, GRL의 학년 대응은 Fountas와 Pinnell의 단계표를 따른 것이다. 세 지수는 재는 방식이 다르므로, 한 책이 세 자 위에서 똑같은 학년 칸에 떨어지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제작사들 스스로도 지수를 정확히 맞바꾸지 말라고 안내한다. 그래서 이 대응은 “렉사일 700이면 GRL로는 대략 이 언저리” 정도의 눈어림으로만 쓰는 것이 맞다.
아이 지수에서 얼마나 위아래로 고를까
표로 자리를 잡았다면 다음 질문이 온다. 아이 지수가 렉사일 600이면 600짜리 책만 줘야 하는가. 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지수를 만든 쪽에서도 한 점이 아니라 범위로 쓰라고 안내한다.
Renaissance는 아이마다 ZPD(아이가 큰 무리 없이 소화하면서도 조금은 새로운 것을 만나는 난이도의 폭)라 부르는 권장 범위를 준다. 한 점에 정확히 맞추는 대신 이 폭 안에서 책을 고르라는 뜻이다. 범위가 맞는지 확인하는 기준으로 Renaissance는 아이가 읽은 책의 이해도가 대체로 85% 이상 유지되는지를 본다. 열 가운데 여덟아홉을 붙들고 읽는다면 그 난이도가 지금 아이에게 맞는다는 신호이고, 그 아래로 자꾸 떨어지면 책이 앞서간 것이다.
범위 안에서 위쪽을 고를지 아래쪽을 고를지는 목적으로 정한다. 아이 혼자 즐겁게 읽히려면 범위의 아래쪽, 곧 이미 편한 난이도를 고른다. 여기서 유창성과 읽는 재미가 자란다. 곁에서 도와주며 한 뼘 밀어 올리려면 범위의 위쪽을 고르되, 위쪽 책을 도움 없이 혼자 읽게 두면 아이는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지쳐 버린다. 지수를 범위로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목적에 따라 한 칸씩 조절한다는 뜻이다.
같은 지수인데 왜 체감 난이도가 다를까
범위까지 잡았어도 숫자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지수가 같은 두 책이 아이에게 전혀 다른 벽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원서 두 권을 나란히 놓으면 이 차이가 분명해진다.
케이트 디카밀로의 Because of Winn-Dixie와 로이스 라우리의 Number the Stars는 공개된 지수로는 각각 약 610L, 670L이다. 지수만 보면 거의 같은 칸에 놓인다. 그러나 두 책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딴판이다. Because of Winn-Dixie는 낯선 동네로 이사 온 외로운 소녀와 개 한 마리를 둘러싼 잔잔한 이야기로, 감정의 결이 열 살 아이가 바로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 Number the Stars는 2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하의 덴마크에서 유대인 이웃을 숨기는 이야기다. 문장 난이도는 비슷해도 홀로코스트라는 배경지식과 전시의 공포와 상실이라는 정서 무게가 얹힌다. 지수가 같아도 두 책이 아이에게 같은 벽은 아니다.
반대 방향의 착시도 있다. 제프 키니의 Diary of a Wimpy Kid는 지수가 900L을 넘어, 숫자만 보면 중학교 텍스트 언저리에 놓인다. 그러나 만화와 짧은 일기 형식, 가벼운 유머 덕에 그 숫자가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지수는 문장과 단어의 기계적 특성을 재느라, 오히려 가벼운 책의 숫자를 높게 매기기도 한다.
이 어긋남은 우연이 아니다. CCSS는 텍스트 난이도를 세 갈래로 나눠 보라고 정리한다. 하나는 문장 길이와 단어 빈도 같은 양적 요소이고, 이것이 바로 Lexile과 ATOS가 재는 부분이다. 둘째는 의미의 층위, 글의 구조, 배경지식 요구 같은 질적 요소로, 이것은 사람이 읽어 보고 가려내는 몫이다. 셋째는 읽는 아이와 과제의 문제다. 같은 책도 그 아이의 관심과 경험, 읽는 목적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지수가 재는 것은 이 셋 중 첫째 하나뿐이다. Winn-Dixie와 Number the Stars의 차이는 둘째에서, 뒤에서 볼 한국 아이의 착시는 셋째에서 온다.
한국 아이에게 지수를 읽는 법
셋째 갈래, 곧 읽는 아이의 문제로 오면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세 지수는 모두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아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수 4.7은 우리 아이가 미국 4학년 수준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책이 미국 4학년용 텍스트의 난이도라는 뜻일 뿐이다. 읽기 지수는 말 그대로 읽기의 난이도를 가리킬 뿐, 아이의 말하기나 전반적인 영어 실력과 하나씩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읽기 지수가 높다고 회화가 그만큼 되는 것도, 그 반대도 아니다.
그래서 지수는 고정된 등수로 읽기보다 아이 안에서의 변화 추세로 읽는 편이 낫다. 다른 아이의 지수와 나란히 세워 서열을 매기는 순간, 지수는 아이를 돕는 도구에서 아이를 재는 자로 바뀐다. 지난달에는 버거워하던 지수의 책을 이번 달에는 편하게 읽는다면, 그 변화가 다른 누구와 비교한 숫자 하나보다 정확한 신호다. 아이 자신의 지난 기록이 가장 공정한 기준선이 된다.
정리하면 지수는 세 가지를 준다. 세 척도를 학년으로 옮겨 대략 견주는 눈어림, 아이 지수를 중심으로 한 책 선택의 범위, 그리고 그 범위가 맞는지 확인하는 이해도 기준이다. 여기까지는 숫자가 맡는다. 그다음, 같은 지수의 책이 아이에게 어떤 경험이 될지는 숫자 바깥에 있다. 지수가 잡아 준 범위 안에서 몇 권을 함께 읽어 보고, 아이가 어디서 웃고 어디서 멈추는지를 보는 것이 숫자 뒤의 진짜 정보다. 우리도 아이마다 지수로 출발점을 잡되, 그 출발점이 맞는지는 아이의 반응으로 매번 다시 맞춘다.
참고한 자료
- Renaissance Learning. ATOS Readability Formula 및 Accelerated Reader 안내(권장 난이도 ZPD 범위 포함).
- MetaMetrics. The Lexile Framework for Reading.
- National Governors Association Center for Best Practices & Council of Chief State School Officers. (2010). Common Core State Standards for English Language Arts, Appendix A.
- Fountas, I. C., & Pinnell, G. S. (2017). Guided Reading: Responsive Teaching Across the Grades (2nd 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