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과학 | 6분 읽기

학원 다닌 지 반년인데 영어로 말을 안 해요

에픽어학원 , 읽기의 과학, 원서 중심, 데이터 기반 영어 교육

영어를 배운 지 반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좀처럼 영어로 입을 열지 않으면 부모는 조바심이 난다. 언어 습득 연구는 말이 나오기 전에 이해가 먼저 쌓이는 침묵기를 오래전부터 기록해 왔고, 녹음 연구는 조용한 아이가 혼잣말로 이미 연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침묵기가 모든 아이의 필수 단계는 아니어서 기다림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글은 침묵기 연구의 두 갈래를 살피고, 기다려도 되는 신호와 점검이 필요한 신호를 가르는 기준을 정리한다.


반년째 입을 열지 않는 아이

학원에 다닌 지 반년이 지났다. 하원길에 오늘 영어로 뭘 했는지 물으면 아이는 한국어로만 대답한다. 숙제도 하고 수업도 곧잘 따라간다는데, 집에서는 영어 한마디가 나오지 않는다. 옆집 아이는 벌써 영어로 문장을 말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면 걱정은 두 갈래로 자란다. 수업이 헛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는 시기와 배우지 않는 시기는 다르다. 언어 습득 연구는 말이 나오기 전에 이해가 먼저 쌓이는 구간을 오래전부터 기록해 왔다.

말이 없다고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새 언어를 만난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 소리를 구별하고, 자주 나오는 표현을 덩어리로 저장하고, 상황과 말을 연결한다. 이 과정은 입이 아니라 귀에서 진행된다. 그래서 아직 말하지 못하는 아이도 이미 꽤 많은 것을 알아듣고 있는 경우가 많다. 듣고 이해하는 힘, 즉 수용 언어(receptive language)가 말하고 쓰는 힘보다 앞서 자라는 것은 모국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기는 “물”이라고 말하기 훨씬 전에 물이라는 말을 알아듣는다.

침묵기라는 개념

이 구간을 언어 습득 연구에서는 침묵기(silent period)라고 부른다. 언어학자 Stephen Krashen은 새 언어를 배우는 아이가 곧바로 말을 쏟아내지 않고, 알아듣는 시간을 먼저 거친 뒤 준비가 되었을 때 산출을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아동의 제2언어 습득을 오래 관찰한 Patton Tabors도 영어를 처음 만난 아이들이 한동안 말없이 듣고 지켜보는 시기를 지난다는 점을 기록했다.

이해가 표현을 앞선다

핵심은 순서다. 이해가 먼저 차오르고, 표현은 그 위에서 나온다. Krashen이 말한 이해 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 즉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말은 이 시기의 재료다. 다만 재료가 쌓인다고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산출에는 말해 볼 기회와 틀려도 괜찮은 분위기가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침묵기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시키는 압박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만나는 시간과 부담 없이 입을 떼 볼 수 있는 자리다.

조용한 입 안에서 일어나는 일

언어학자 Muriel Saville-Troike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영어 환경에 새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소형 마이크를 달아 침묵기의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겉으로 조용하던 아이들은 혼잣말(private speech)로 들은 표현을 조그맣게 따라 하고, 단어를 바꿔 끼우며 문장을 지어 보고, 소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침묵기는 멈춘 시간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연습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다만 모든 아이가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기를 정설로만 전달하면 반쪽이다. Theresa Roberts는 2014년 아동의 제2언어 습득에서 침묵기를 다룬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침묵기가 모든 아이가 거치는 필수 단계라는 근거는 생각보다 약하다고 정리했다. 새 언어를 만나자마자 몇 마디씩 시도하는 아이도 있고, 어떤 아이의 긴 침묵은 내면의 준비 과정이라기보다 말해 볼 기회와 곁에서 받아 주는 어른이 부족했던 환경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검토가 부모에게 주는 결론은 두 겹이다. 아이의 침묵 자체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결론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해가 쌓이는 시간을 지켜 주는 일과, 아이가 부담 없이 말해 볼 자리를 계속 열어 두는 일은 함께 간다.

왜 어떤 아이는 더 오래 침묵할까

침묵기의 길이는 아이마다 크게 다르다. Tabors가 관찰한 아이들 중에는 몇 주 만에 말문이 트인 아이도, 몇 달 넘게 듣기만 한 아이도 있었다. 기질이 신중한 아이는 틀리지 않을 자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나이도 영향을 주는데 방향이 하나는 아니다. Tabors의 관찰에서는 어린 아이일수록 말없이 지켜보는 시기가 긴 편이었고, 반대로 자기를 의식하는 힘이 자란 아이는 이해가 빨라도 실수가 신경 쓰여 입을 여는 문턱이 높아지기도 한다.

여기에 한국의 노출 환경이 시간을 더한다. 몰입 환경의 아이는 하루 대부분을 새 언어 속에서 보내지만, 한국의 초등학생에게 영어는 대개 주에 몇 시간 만나는 언어다. 집에도 학교에도 영어로 대답을 기다려 주는 상대가 없다면, 이해가 차오르는 속도와 산출을 시도할 기회 모두 몰입 환경과 다른 시계로 움직인다. 해외 관찰에서 나온 몇 주에서 몇 달이라는 범위를 한국 아이에게 그대로 대입하기 어려운 이유이고, 옆집 아이와의 단순 비교가 기준이 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반년이라도 두 아이가 서 있는 지점은 다를 수 있다.

기다림과 점검을 가르는 신호

그렇다고 모든 침묵을 무한정 기다리라는 뜻은 아니다. 기다림과 점검을 가르는 기준은 산출이 아니라 이해다. 다음을 보면 방향이 잡힌다.

  • 아이가 영어 지시를 듣고 몸으로 반응하는가. 앉으라는 말, 책을 펴라는 말에 맞게 움직인다면 이해가 자라는 중이다.
  • 손짓이나 단어 하나로라도 뜻을 주고받는가. 완전한 문장은 아니어도 소통의 시도가 있는가.
  • 좋아하는 영어책이나 영상 앞에서 반응이 있는가. 웃고,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아는 장면에서 눈이 커지는가.

이 신호들이 보인다면 아이는 침묵기를 정상적으로 지나는 중이다.

점검이 필요한 쪽의 기준에는 눈금을 달아 두는 편이 낫다. 기간 그 자체보다 이해의 방향을 본다. 지금의 아이를 두세 달 전과 비교했을 때 알아듣는 지시가 늘었는가, 반응하는 장면이 많아졌는가. Tabors가 관찰한 몰입 환경에서도 이 시기는 몇 주에서 몇 달에 걸쳐 있었으니, 노출이 주 몇 시간인 환경이라면 시계는 그보다 넉넉히 잡는 것이 맞다. 다만 기간을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두세 달 간격으로 돌아봤을 때 이해의 신호가 전혀 늘지 않았다면, 그리고 영어만이 아니라 모국어에서도 듣고 이해하는 반응이 또래보다 뚜렷이 약하다면, 언어 노출의 문제인지 다른 발달의 문제인지 전문가와 나누어 볼 시점이다. 이때 보는 것도 역시 말의 유무가 아니라 이해의 성장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

침묵기의 아이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압박을 낮추되 기회를 닫지 않는 일이다. “영어로 말해 봐”라는 요구가 반복되면 아이는 영어를 실패의 자리로 기억한다. 대신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편하게 만나는 시간을 늘리고, 그 안에 답해도 되고 답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자리를 만들어 둔다. 함께 영어 그림책을 읽다가 답을 강요하지 않는 질문을 툭 던져 두는 것, 아이가 고르기만 하면 되는 짧은 선택지를 주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아이가 준비되면 대개 완전한 문장보다 짧은 한마디로 먼저 나온다. 그 한마디를 고쳐 주지 않고 반갑게 받아 주는 것이 다음 말을 부른다.

Saville-Troike의 마이크가 들려준 것처럼, 조용한 아이의 입 안에서는 이미 연습이 돌아가고 있다. 부모가 할 일은 그 연습이 밖으로 나올 문을 열어 두고, 문 앞에서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참고한 자료

  • Krashen, S. D. (1982). Principles and Practice in Second Language Acquisition.
  • Tabors, P. O. (2008). One Child, Two Languages: A Guide for Early Childhood Educators of Children Learning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2nd ed.).
  • Saville-Troike, M. (1988). Private Speech: Evidence for Second Language Learning Strategies During the “Silent” Period.
  • Roberts, T. A. (2014). Not So Silent After All: Examination and Analysis of the Silent Stage in Childhood Second Language Acqui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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