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정말 이를수록 좋을까
영어는 한 살이라도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는 말은 부모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작 나이를 다룬 언어 습득 연구의 결론은 통념보다 조심스럽다. 오래 노출되는 몰입 환경에서는 이른 시작이 유리하지만, 한국처럼 노출 시간이 제한된 학습 환경에서는 늦게 시작한 아이가 오히려 더 빠르게 배우기도 한다. 이 글은 결정적 시기 가설을 둘러싼 연구를 정리하고, 나이보다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짚는다.
이를수록 좋다는 말, 절반만 맞다
“영어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작하는 것이 좋다.” 부모라면 한 번쯤 들어 본 말이고, 이 말은 종종 조급함으로 바뀐다. 옆집 아이가 세 살에 영어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다섯 살, 일곱 살 아이의 부모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데 시작 나이를 다룬 언어 습득 연구의 결론은 이 통념보다 조심스럽다. 이를수록 좋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나머지 절반은 어떤 환경에서 배우는가에 달려 있다.
이를수록 좋다는 말은 어디서 왔나
이 통념의 뿌리에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언어를 습득하는 데 유리한 발달의 창이 어린 시절에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원어민 수준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는 생각이다. 이 가설의 근거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이 Johnson과 Newport가 1989년에 발표한 이주자 연구다. 두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어와 한국어 화자들의 영어 문법 감각을 조사했더니, 어린 나이에 도착한 사람일수록 원어민에 가까운 성적을 보였고 이주 나이가 늦어질수록 성적이 내려가는 경향이 뚜렷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를수록 좋다는 말이 옳아 보인다.
몰입 환경이라는 전제
그러나 이 연구들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다. 영어에 온종일 잠기는 몰입 환경, 그리고 오랜 세월이라는 조건이다. 하루 대부분을 영어로 살아가는 아이에게는 이른 시작이 시간이라는 자산과 결합해 이점이 된다. 문제는 한국의 대다수 아이가 이 전제 안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루에 영어를 만나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나머지 시간은 한국어로 산다. 전제가 다르면 결론도 달라진다.
학습 환경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교실에서 정해진 시간만큼 배우는 환경을 연구에서는 학습을 통한 습득(instructed second language acquisition)이라고 부른다. 이 환경을 오래 관찰한 대표적인 연구가 스페인에서 진행된 바르셀로나 나이 요인 연구(Barcelona Age Factor)다. 연구를 이끈 Carmen Muñoz는 같은 시간을 배운다면 늦게 시작한 아이가 이른 나이에 시작한 아이보다 더 빠르게 배우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유는 인지 발달에 있다. 나이가 든 아이는 규칙을 정리하고, 기억 전략을 쓰고, 자기 학습을 점검하는 힘이 더 자라 있다. 노출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이 효율이 크게 작용한다. 어린아이의 강점인 오랜 노출을 통한 자연스러운 흡수는, 노출 시간이 짧으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
발음이라는 예외
한 가지 예외는 발음이다. 발음과 나이의 관계를 오래 연구한 James Flege는 동료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한 이탈리아어 화자들의 영어 발음을 조사했고, 이주 나이가 어릴수록 외국어 억양이 옅다는 꾸준한 경향을 1995년 연구에서 보고했다. 어린 나이의 이점이 가장 뚜렷하게 남는 영역이 발음이다. 다만 부모가 판단할 때 물어야 할 것은 우선순위다. 아이의 영어 교육 목표가 원어민과 구별되지 않는 억양인지, 아니면 읽고 쓰고 생각을 전달하는 힘인지에 따라 이른 시작의 무게가 달라진다.
나이보다 중요한 것
연구들을 모으면 결론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Pfenninger와 Singleton은 2017년 연구에서 시작 나이 하나로는 아이의 최종 도달 수준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정리했다. 시작 나이 자체보다 아이가 만나는 입력의 양과 질,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오래 이어 가느냐가 성취를 더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다. 세 살에 시작해 이내 그만둔 아이보다, 일곱 살에 시작해 꾸준히 좋은 입력을 만난 아이가 더 멀리 간다. 시작 시점은 한 번의 선택이지만, 입력의 질과 지속은 매일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취를 만드는 것은 대개 매일의 선택 쪽이다.
조급함을 내려놓아도 되는 이유
그래서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약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아이가 어떤 영어를 만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만남이 아이에게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에 가까운가다. 이른 나이에 시작해 영어를 밀어내게 된 아이보다, 준비된 때에 시작해 영어를 반기는 아이가 결국 더 오래 배운다. 그렇다면 준비된 때는 무엇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
준비된 때를 알아보는 세 가지 신호
첫째, 아이가 한글 책과 이야기를 즐기는가다. 모국어로 이야기를 따라가는 힘, 글의 앞뒤를 잇고 뜻을 좇는 습관은 새 언어를 배울 때 그대로 밑천이 된다. 한글 이야기가 아직 낯선 아이라면 영어를 서두르기보다 모국어 기반을 먼저 채우는 편이 순서에 맞다.
둘째, 아이가 영어 노출을 반기는가다. 영어 노래나 그림책, 영상을 만났을 때 다가오는지 밀어내는지는 부모가 집에서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 밀어내는 반응이 이어진다면 나이 계산 때문에 끌어다 앉히기보다, 방식을 바꾸거나 몇 달 뒤에 다시 시도하는 쪽이 낫다. 시작이 빨라서 얻는 이점보다 영어가 싫어져서 잃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셋째, 시작한 노출을 몇 년 단위로 이어 갈 여건이 되는가다. Pfenninger와 Singleton이 정리했듯 성취를 좌우하는 것은 입력의 양과 질, 그리고 지속이다. 몇 달 배우다 끊길 시작이라면 이른 시작의 이점은 남지 않는다. 시작을 앞당기는 것보다 끊기지 않을 시점을 고르는 것이 연구의 결론에 가깝다.
이 세 신호가 갖춰졌다면 그때가 준비된 때다. 그 시점이 다섯 살이든 여덟 살이든, 노출이 제한된 학습 환경에서 그 차이가 최종 성취를 가른다는 근거는 연구에서 찾기 어렵다. 몇 살에 시작하느냐는 질문은, 어떤 영어를 얼마나 오래 만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놓을 때 답이 선명해진다.
참고한 자료
- Johnson, J. S., & Newport, E. L. (1989). Critical Period Effects in Second Language Learning: The Influence of Maturational State on the Acquisition of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 Muñoz, C. (Ed.). (2006). Age and the Rate of Foreign Language Learning.
- Flege, J. E., Munro, M. J., & MacKay, I. R. A. (1995). Factors Affecting Strength of Perceived Foreign Accent in a Second Language.
- Pfenninger, S. E., & Singleton, D. (2017). Beyond Age Effects in Instructional L2 Learning: Revisiting the Age Fac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