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과학 | 9분 읽기

유창성과 정확성, 둘 중 하나 먼저인가

에픽어학원 , 읽기의 과학, 원서 중심, 데이터 기반 영어 교육

유창성과 정확성은 어느 쪽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다. LaBerge와 Samuels의 자동성 이론과 Rasinski의 운율 연구는 유창성이 속도가 아니라 남는 주의라는 것을 보여 주고, Swain의 이머전 관찰은 정확성이 입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글은 두 능력이 서로 다른 경험에서 자란다는 근거 위에서, 부모가 집에서 병목을 읽는 세 가지 신호와 오류의 원인을 가르는 관찰 기준을 제시한다.


서로 반대로 보이는 두 가지 고민

초등에서 영어책을 읽는 아이를 둔 부모가 자주 만나는 고민이 있다. “우리 아이는 영어책을 술술 읽는데 쓰라고 하면 문법이 자꾸 틀려요. 정확성을 먼저 잡아야 할까요, 아니면 계속 많이 읽히면서 유창성을 더 키워야 할까요.” 반대편 고민도 있다. “한 단어 한 단어는 정확한데 너무 느리게, 뚝뚝 끊어 읽어요. 속도를 먼저 올려야 하나요.”

두 질문 모두 유창성과 정확성을 시간 순서 위에 세운다. 하나를 먼저 완성하고 그다음에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계단처럼 본다. 그러나 영어를 배우는 아이의 발달에서 이 둘은 직선으로, 순서대로 자라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경험을 먹고, 서로 다른 경로로 자란다.

부모가 볼 것은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인가가 아니라,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이다. 유창성이 앞서 자란 아이와 정확성이 앞서 자란 아이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막혀 있고, 필요한 다음 걸음도 다르다.

유창성과 정확성은 서로 다른 능력이다

먼저 두 말의 뜻부터 나눈다. 유창성(fluency)은 글을 정확하게, 적절한 속도로, 의미 단위에 맞게 끊어 읽는 힘이다. 읽기 유창성 연구자 Timothy Rasinski는 유창성을 세 겹으로 본다. 단어를 바르게 알아보는 정확도,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읽히는 자동성, 그리고 뜻에 맞게 끊고 억양을 살리는 운율(prosody)이다. 빨리 읽는 속도는 이 가운데 자동성이 만들어 내는 결과 하나일 뿐이다. 한편 부모가 걱정하는 정확성(accuracy)은 대개 그 반대쪽, 아이가 직접 말하고 쓸 때 어순, 시제, 관사 같은 세부를 어긋남 없이 다루는 힘을 가리킨다.

이 둘이 왜 따로 노는지는 뇌가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읽거나 들을 때 아이는 핵심 단어 몇 개만 잡아도 대략의 뜻을 만들 수 있다. 문장 전체를 하나하나 해부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러나 직접 말하거나 쓸 때는 어순을 정하고, 시제를 고르고, 관사를 붙일지 말지를 매 순간 결정하게 된다. 이해할 때는 넘어갔던 세부가 표현할 때는 하나씩 손에 걸린다.

그래서 이 질문은 둘로 쪼개서 봐야 답이 나온다. 읽기 쪽의 유창성은 어떻게 자라는가. 표현 쪽의 정확성은 어떻게 자라는가.

유창성의 정체는 속도가 아니라 남는 주의다

읽기 쪽부터 보자. LaBerge와 Samuels는 1974년 자동성 이론(automaticity theory)에서 이 문제의 뼈대를 세웠다. 사람이 한 번에 쓸 수 있는 주의의 양은 정해져 있다. 글자를 소리로 바꾸는 해독에 주의를 쓰는 만큼, 뜻을 잡는 데 쓸 주의는 줄어든다. 해독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아이만이 남는 주의를 문장의 뜻과 이야기의 흐름에 쓸 수 있다. 뚝뚝 끊어 읽는 아이가 방금 읽은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잦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을러서도,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다. 주의가 글자 단계에서 이미 바닥났기 때문이다.

끊어 읽는 방식 자체도 신호가 된다. 미국의 국가 수준 읽기 평가인 NAEP는 4학년 아이들의 소리 내어 읽기를 대규모로 채점하면서, 단어를 하나씩 떨어뜨려 읽는 수준부터 의미 단위로 묶어 표현을 살려 읽는 수준까지 유창성을 여러 단계로 나눴다. 이 조사에서 의미 단위로 묶어 읽는 아이들이 독해 성적도 높은 경향이 함께 확인됐다. 운율은 유창성의 장식이 아니라, 아이가 문장의 뜻을 따라가고 있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라는 뜻이다. Rasinski가 운율을 유창성과 독해를 잇는 다리로 꼽는 이유도 같다.

여기에 한국 아이 특유의 결이 하나 얹힌다. 한국어는 모든 음절에 비슷한 시간을 주는 언어이고, 영어는 강세에 따라 리듬이 출렁이는 언어다. 그래서 한국 아이는 영어를 읽을 때 모든 음절을 고르게 눌러 읽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의미 단위로 묶어 읽는 운율을 익히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런 읽기는 게으름이 아니라 두 언어의 소리 체계가 부딪히는 지점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시간과 좋은 소리 시범이 필요한 문제다.

정확성은 입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표현 쪽 절반은 사정이 다르다. 캐나다의 이머전(immersion, 특정 언어로 교과를 가르치는 몰입 교육) 학생들을 오래 관찰한 Merrill Swain의 연구가 기준점이다. 수년간 프랑스어에 잠겨 지낸 아이들은 듣고 이해하는 쪽에서는 또래 원어민과 견줄 만했지만, 직접 만들어 내는 문장의 문법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노출이 모자라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Swain은 여기서 출력 가설(Output Hypothesis)을 끌어냈다.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입력은 언어의 바탕이지만, 정확성은 아이가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직접 밀어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빈틈을 피드백으로 메울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가설의 세부가 아니라 방향이다. 유창성은 좋은 입력 속에서 함께 자라지만, 정확성은 표현하고 고쳐 받는 별도의 경험을 요구한다. 그래서 “많이 읽으면 문법도 저절로 잡힌다”는 통념은 절반만 맞다. 책을 더 얹는 처방이 유창성 병목에는 답이 될 수 있어도, 정확성 병목 앞에서는 방향이 어긋난 처방이 된다.

그래서 먼저가 아니라 지금 어디인가

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두 고민이 다르게 보인다. “유창성이 먼저냐 정확성이 먼저냐”는 계단식 질문이었다. 그러나 두 능력이 서로 다른 경험에서 자란다면, 물을 것은 순서가 아니라 위치다. 아이가 지금 어느 쪽에서 막혀 있는가.

앞의 두 아이를 다시 보자. 책은 술술 읽는데 쓰면 문법이 자꾸 틀리는 아이는 입력이 상당히 쌓여 유창성은 앞서 있지만 표현 경험이 부족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책을 더 늘리는 일이 아니라, 짧더라도 자기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에서 드러난 빈틈을 짚어 주는 피드백을 받는 경험이다. 반대로 한 단어씩 정확하게 읽지만 너무 느리고 뚝뚝 끊는 아이는 해독이 아직 자동으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 아이에게 갑자기 어려운 글쓰기를 밀어붙이면 오히려 무너진다. 이미 아는 패턴이 많은 쉬운 글을 골라 같은 글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고, 능숙한 어른의 소리를 들으며 따라 읽는 쪽이 맞다. Rasinski가 유창성 지도에서 거듭 권하는 방식도 이 두 가지, 반복해서 읽기와 좋은 소리를 곁에 두고 함께 읽기다.

같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인상이지만 병목은 정반대에 있다. 순서를 정해 놓고 모든 아이에게 같은 계단을 오르게 하면, 이미 그 계단을 지난 아이에게는 시간을 낭비시키고, 아직 앞 계단에 있는 아이에게는 넘지 못할 벽을 세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유창성과 정확성 어느 쪽을 보든, 마지막에 확인할 것은 이해가 함께 따라오는지다. 빠르고 자연스럽게 읽는 소리가 나도 방금 읽은 내용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유창성은 뜻과 분리된 껍데기일 수 있다. 문법이 정확한 문장을 쓰지만 하고 싶은 말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 정확성도 반쪽이다. 유창성도 정확성도 결국 아이가 뜻을 깊이 다루기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오류를 세는 것과 오류를 읽는 것

정확성 이야기가 나오면 부모는 자연스럽게 오류를 떠올린다. 그런데 오류를 다루는 방식에는 두 층이 있다. 하나는 오류의 개수를 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류의 원인을 읽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아이가 글에서 관사를 자꾸 빠뜨린다고 하자. “I went to library”라고 쓴 문장에 빨간 줄을 긋고 개수를 세면 거기서 끝난다. 그러나 같은 오류라도 원인은 갈린다. 한국어에는 관사가 없어서 아이의 머릿속 문법에 아직 그 자리 자체가 생기지 않은 모국어 간섭(L1 interference, 모국어의 습관이 새 언어에 끼어드는 현상)일 수도 있고, 자리는 이미 생겼는데 그날 문장에서 우연히 놓친 실수일 수도 있다. 앞의 경우라면 관사가 왜 필요한지부터 다시 만나는 수업이 필요하고, 뒤의 경우라면 쓰고 나서 스스로 점검하는 습관 하나로 충분하다.

집에서도 이 둘을 가를 단서는 있다. 첫째, 같은 유형의 오류가 여러 글에서 반복되는가. 한 번 나온 오류는 실수일 수 있지만, 글마다 같은 자리에서 되풀이되는 오류는 체계에 가깝다. 둘째, 짚어 주면 스스로 고치는가. “여기 뭔가 빠지지 않았어?”라고만 물었을 때 아이가 바로 관사를 찾아 넣는다면 알고도 놓친 쪽이고, 무엇이 빠졌는지 감을 못 잡는다면 아직 배우는 중인 쪽이다. 셋째, 고쳐 준 다음 글에서도 같은 오류가 그대로 나오는가. 교정이 스며들지 않고 튕겨 나온다면 그 자리는 설명과 연습이 따로 필요한 자리다.

이 세 단서는 아이가 받는 피드백의 질을 가리는 기준으로도 쓸 수 있다. 아이의 글에 “틀렸다”는 표시만 돌아오는지, 아니면 이 오류가 한국어의 습관에서 온 것인지 배우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혼동인지까지 짚어 주는지. 오류의 원인을 가르려면 영어만이 아니라 한국어가 영어에 어떻게 끼어드는지 아는 눈이 필요하고, 그 눈이 있는 피드백과 없는 피드백은 아이의 다음 걸음을 전혀 다르게 만든다.

부모가 집에서 볼 세 가지 신호

집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신호는 세 가지다. 아이를 평가해 등급을 매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느 쪽을 도울지 가늠하기 위한 관찰이다.

첫째, 읽을 때 멈춤이 잦은가. 한 문장 안에서 자주 멈춰 소리를 조립한다면 해독이 아직 자동으로 돌아가지 않는, 유창성이 덜 자란 상태일 수 있다. 이때는 어려운 책을 더하기보다 이미 아는 패턴이 많은 짧고 쉬운 글을 골라, 같은 글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게 하는 편이 낫다. 읽을 때마다 흐름이 매끄러워지는 것을 아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이 시기의 연료다.

둘째, 읽거나 이해하는 것에 견주어 말하고 쓰는 것이 유독 뒤처지는가. 뜻은 잘 따라가는데 자기 문장을 만들 때 오류가 두드러진다면, 입력은 쌓였으나 표현 경험이 부족한 상태일 수 있다. 책의 양을 늘리기보다, 짧은 글이라도 자기 문장을 만들고 오류의 원인까지 짚어 주는 피드백을 받는 경험이 필요한 시점이다.

셋째, 유창하든 정확하든 뜻이 함께 붙는가. 소리는 그럴듯한데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문장은 반듯한데 하고 싶은 말이 없다면, 유창성이나 정확성이 뜻과 분리되어 있다는 신호다. 읽고 나서 무슨 이야기였는지 한두 문장으로 말해 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신호는 꽤 잘 드러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속도나 문법 교정이 아니라 뜻을 다루는 경험을 다시 두껍게 하는 일이다.

이 세 신호는 아이를 한 문장으로 낙인찍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어디에서 힘이 빠지는지 보고, 그에 맞는 다음 걸음을 찾기 위한 관찰이다.

순서를 묻지 말고 병목을 찾는다

유창성과 정확성은 앞뒤로 줄 세울 수 있는 두 계단이 아니다. 해독이 자동으로 돌아가 남는 주의가 뜻으로 넘어갈 때 유창성이 자라고, 자기 표현을 만들고 그 빈틈에 피드백을 받을 때 정확성이 자란다. 그래서 “무엇을 먼저”라는 질문은 방향이 어긋나 있다. 아이마다, 시점마다 병목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를 다그치거나 오류를 세는 조바심이 아니라,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읽어 내는 눈이다. 유창성이 앞선 아이에게는 표현과 피드백을, 정확성만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는 자동화와 흐름을 준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마지막에는 뜻이 함께 자라는지를 확인한다. 우리도 상담에서 아이를 만날 때 수치 하나나 오류 개수 하나가 아니라 이 신호들을 함께 놓고 병목의 위치부터 찾는다. 순서가 아니라 위치를 묻는 것, 그것이 이 질문의 답이다.

참고한 자료

  • LaBerge, D., & Samuels, S. J. (1974). Toward a Theory of Automatic Information Processing in Reading.
  • Rasinski, T. V. (2004). Creating Fluent Readers.
  • Pinnell, G. S., et al. (1995). Listening to Children Read Aloud: Data from NAEP’s Integrated Reading Performance Record at Grade 4.
  • Swain, M. (1985). Communicative Competence: Some Roles of Comprehensible Input and Comprehensible Output in Its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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