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과학 | 6분 읽기

한글은 금방 뗐는데 영어 파닉스는 왜 오래 걸릴까

에픽어학원 , 읽기의 과학, 원서 중심, 데이터 기반 영어 교육

한글을 금방 뗀 아이가 영어 파닉스에서 오래 머물면 부모는 아이의 능력이나 수업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문자 체계 연구가 가리키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한글은 글자와 소리의 대응이 매우 규칙적인 투명한 문자이고, 영어는 알파벳 문자 중에서도 예외가 가장 많은 불투명한 문자다. 이 글은 유럽 13개 문자 비교 연구와 파닉스 지도 연구를 바탕으로, 영어 읽기가 더 오래 걸리는 것이 아이의 한계가 아니라 문자가 요구하는 시간임을 설명한다. 부모가 진도 속도 대신 볼 신호도 함께 정리한다.


상담실에서 나온 질문

한 어머니가 상담에서 이렇게 물었다. “한글은 여섯 살 때 몇 달 만에 뗐거든요. 그런데 영어는 파닉스만 1년 넘게 하고 있어요. 우리 애가 영어 머리가 없는 걸까요.” 이 질문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한글을 배우던 속도가 글자를 배우는 기본 속도라는 전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문제는 아이도 수업도 아니다. 두 문자가 아이에게 요구하는 학습량 자체가 다르다.

같은 아이가 두 개의 문자를 배우고 있다

한글을 빨리 뗀 아이가 영어 앞에서 오래 머물면, 부모는 아이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수업의 효과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읽기 연구가 먼저 가리키는 곳은 아이가 아니라 문자다. Castles, Rastle, Nation은 2018년 종합 논문 ‘Ending the Reading Wars’에서 초기 읽기 발달의 핵심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못 박았다. 문자 체계가 중요하다(the writing system matters). 어떤 문자를 배우는가가 읽기 학습의 난이도와 시간표를 크게 좌우한다는 뜻이다. 한글을 뗀 아이가 영어 알파벳을 배우고 있다면, 같은 아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코드를 푸는 중이다. 두 학습의 속도가 다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자마다 코드의 투명도가 다르다

문자는 말소리를 글자로 옮긴 약속이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얼마나 규칙적인가는 문자마다 다르다. 글자와 소리가 거의 일대일로 대응해 규칙만 알면 소리를 예측할 수 있는 문자를 투명한 문자(transparent orthography)라고 부르고, 하나의 글자가 여러 소리로 나며 예외가 많은 문자를 불투명한 문자(opaque orthography)라고 부른다.

한글은 투명한 쪽의 대표에 가깝다. ‘ㅏ’는 어느 단어에서나 거의 같은 소리로 나고, 자모와 소리의 대응을 익히면 처음 보는 글자도 대부분 소리 낼 수 있다.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배우는 아이들을 다룬 Wang, Park, Kim의 2006년 연구도 한글의 이런 규칙성을 논의의 전제로 삼는다. 영어는 반대쪽 끝에 있다. 같은 글자 a가 cat, cake, car에서 서로 다른 소리로 나고, 같은 소리가 여러 철자로 적힌다. Share는 2008년 논문에서 영어가 알파벳 문자들 사이에서도 예외적으로 불규칙한, 무리에서 홀로 벗어난 문자(outlier orthography)라고 불렀다. 영어를 기준으로 쌓여 온 읽기 연구가 오히려 특수한 사례 위에 서 있다는 비판이었다.

유럽 13개 문자 비교가 보여준 것

이 차이를 실제 아이들의 습득 속도로 보여준 연구가 있다. Seymour, Aro, Erskine은 2003년에 유럽 13개 문자권의 초등 1학년 아이들이 단어를 얼마나 정확히 읽는지 비교했다. 핀란드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처럼 투명한 문자권의 아이들은 첫 학년 안에 익숙한 단어를 거의 정확하게 읽는 수준에 도달했다. 영어권 아이들은 가장 뒤에 있었다. 연구진은 영어권 아이들의 읽기 습득이 다른 문자권 아이들보다 뚜렷이 느리다고 결론지었다. 같은 알파벳을 쓰고 비슷한 학교 교육을 받는데도 문자의 투명도가 시간표를 갈랐다. 아이의 지능이나 가정의 노력이 가른 것이 아니다.

영어는 하나하나 짚어 가며 오래 가르치는 문자다

불투명한 문자일수록 아이가 노출만으로 규칙을 스스로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글자와 소리의 관계를 순서에 따라 직접 가르치는 체계적 파닉스 지도의 가치가 커진다. 미국 국립 읽기 위원회(National Reading Panel)는 2000년 보고서에서 읽기 교육 연구를 종합해, 체계적 파닉스 지도의 효과가 읽기 정확성을 넘어 이해에까지 이어진다고 정리했다. 미국 교육과학연구소의 기초 읽기 실천 가이드(2016)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운 규칙이 실제 단어와 문장 읽기로 이어지도록 가르치라고 권고한다. 배울 규칙이 많고 예외가 많으니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영어 파닉스가 길어지는 것은 수업의 지연이 아니라 이 문자의 정상 경로다.

한글 떼기가 만든 착시

부모의 조급함은 대개 비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비교의 기준은 거의 언제나 한글이다. 그러나 앞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한글은 배우기 쉬운 쪽의 문자이고, 영어는 알파벳 문자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쪽의 문자다. 가장 빠른 시간표를 기준으로 가장 느린 문자를 재면,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는 읽기도 지연으로 보인다. 착시는 아이에게 있지 않고 기준에 있다.

한국 아이에게는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여기까지는 영어권 아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한국 아이에게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영어권 아이는 파닉스를 배우기 전에 이미 영어를 듣고 말해 온 밑천이 있다. 글자를 소리로 바꾸는 데 성공하면 그 소리가 아는 말과 곧바로 이어진다. 한국 아이는 그 밑천이 상대적으로 얇다. 규칙대로 소리 내는 데 성공해도, 그 소리가 뜻으로 이어지려면 아이 안에 영어 말소리와 어휘라는 밑천이 함께 자라야 한다. 그래서 코드 학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규칙을 배우는 시간과 함께,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어 소리와 이야기와 책을 꾸준히 만나는 시간이 나란히 갈 때 배운 규칙이 붙을 자리가 생긴다.

부모가 볼 것은 진도 속도가 아니라 신호다

그렇다면 부모는 무엇을 보면 될까. 진도표의 속도보다 정확한 지표가 있다. 아이가 배운 규칙으로 처음 보는 단어를 읽어내는가다. 교재에서 본 단어를 기억해 읽는 것과, 배운 대응 규칙을 낯선 단어에 적용해 읽는 것은 다른 일이다. 후자가 나타나고 있다면, 진도의 빠르기와 무관하게 학습은 쌓이는 중이다.

다만 점검이 필요한 신호도 있다. 규칙 학습 자체가 누적되지 않는 경우다. 몇 달 전에 다진 패턴을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고, 같은 유형의 단어에서 같은 오류가 오래 반복된다면, 시간이 문제인지 방법이 문제인지 교사와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오래 걸리는 것과 쌓이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래 걸리는 것은 문자의 값이다

한글은 몇 달 만에 뗐는데 영어는 파닉스만 1년 넘게 하고 있다는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 시간의 차이는 아이의 한계도 수업의 실패도 아니다. 투명한 문자와 불투명한 문자가 요구하는 학습량의 차이, 즉 문자의 값이다. 부모가 가져갈 판단 기준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시간표는 한글이 아니라 영어라는 문자에 맞춰 볼 것, 그리고 진도의 빠르기보다 배운 규칙이 처음 보는 단어에서 작동하는지를 볼 것. 이 기준 위에 서면 조급함이 앉을 자리는 생각보다 좁다.

파닉스가 끝난 뒤에도 왜 영어책은 바로 읽히지 않는지, 왜 말은 저절로 늘어도 글 읽기는 따로 배워야 열리는지는 읽기의 과학이 답하는 또 다른 질문이다.

참고한 자료

  • Castles, A., Rastle, K., & Nation, K. (2018). Ending the Reading Wars: Reading Acquisition From Novice to Expert.
  • Seymour, P. H. K., Aro, M., & Erskine, J. M. (2003). Foundation Literacy Acquisition in European Orthographies.
  • Share, D. L. (2008). On the Anglocentricities of Current Reading Research and Practice: The Perils of Overreliance on an “Outlier” Orthography.
  • National Reading Panel. (2000). Teaching Children to Read.
  • What Works Clearinghouse. (2016, revised 2019). Foundational Skills to Support Reading for Understanding in Kindergarten Through 3rd Grade.
  • Wang, M., Park, Y., & Kim, K. R. (2006). Korean-English Biliteracy Acquisition: Cross-Language Phonological and Orthographic Trans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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